함께한 16년!

마음을 여는 광장

나를 보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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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정길
댓글 0건 조회 925회 작성일 06-07-06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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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받아들여야 할 가장 중요한 것(2005. 08. 15)

내가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무엇인가. 아마 나의 배후감정(핵심감정)인 ‘혼자의 고독’일 것이다. 사실 사랑을 많이 받으면 힘든 병의 고통도 죽음까지도 받아들일 수가 있다. 그러나 사랑이 사라진 상태에서 찾아든 병이나 죽음은 정말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결국 ‘혼자의 고독’에서 그 고독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가장 힘든 것이라 볼 수 있다. 나는 이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병이나 죽음 앞에 서있지 않더라도 힘든 것이 ‘사랑 없는 혼자’ ‘인정받지 못하는 혼자’일 것이다.
아마 나에게 가장 힘든 것이 병이나 죽음의 고독일 것이다.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가장 용기 있는 죽음이나 병이 바로 고독 속의 죽음이나 병을 스스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자세일 것이다.
받아들인다는 것이 바로 책임지는 행위와 같다고 본다. 나에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사랑해주지 않는) ‘혼자 짊어진 병과 죽음’이 나의 최종적 자존심이 될 것이다. 이때 ‘나 혼자’는 부정을 극복한 긍정이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항상 주체적(혼자-자기의 힘으로서의 자기인정인)인 나의 자각이 우선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의존심의 자각과 그것의 진지한 인정 그리고 의존심의 무용성의 해석 속에서 의존심은 자꾸 줄여 나갈 수가 있을 것이다.
의존심의 자각.


내가 지금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1(2005. 10. 11)

내가 지금 신경을 많이 쓰고 힘들어하고 있는 내 마음의 집착지점이 어디인가.
아마 ‘내 삶의 성공’에 집착하고 있고 그 반대면 즉 ‘삶의 실패’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사실 이 세상 삶의 성공과 실패는 없는 것 같다. 삶의 성공과 실패는 우리가 만들어 낼 뿐이다.
내 마음에서 내가 만들어낸 ‘성공적인 삶’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정신병에서 나아서 남으로부터 인정받고 성공적인 한 개인으로 살아가고 죽어갔다는 평가임에 분명하다.
내 마음은 이 반대면을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그 면을 조심하고 하나의 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성공적인 삶’이라는 허상에 뺏겨 버리고 의존된 나는 결국 받아들이지 못하는(집착으로부터 생긴) 면을 만들어 버리고 만 것이다. 그래서 나는 힘을 불필요하게 많이 소모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부터 나는 이 ‘성공적인 삶’ 즉 가족과 대인관계 그리고 내 모든 작든 크든 간에 소망과 희망들 모두를 놓아 버려야 한다. 나는 최소한 이러 저러한 것만은 성공적이고 그것들을 지켜내야만 하는 것이라고 습관적 무의식적으로 집착하고 있었다.
나의 애응지물은 여기서 나오는 것이었다. 나는 여기서 쓸데없는 힘든 고통의 시간을 맛본다. 삶의 실패는 언제나 일어난다. 궁극적인 성공도 객관적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결국 나는 내 삶의 모든 성공과 실패들을 초탈해서 그런 것들이 다 허상이란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남는 것은 뭐든지 선택해서 살아왔고 있었고 있는 그대로 삶들이 나의 삶이란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나의 삶’은 언제나 다가오는 그리고 지금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배척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허상으로 만들어진 ‘실패의 면’에 더 이상 집착하지 말고 거기서 해방될 일이다. 아무리 그렇게 실패한다 하더라도 나는 그런 삶이 나의 삶이었다고 그런 ‘나의 삶’을 받아들여야 한다.
삶은 선택하며 요렇게 조렇게 조절하며 산다. 그러나 큰 틀에서 모든 삶을 다 받아들여야 할 것이지 선택의 노예가 되면 안 된다. 선택이 아무리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필연일지라도 나는 그 선택으로 인한 나의 삶의 어떤 집착지점을 만들 필요가 없다.
그냥 선택들을 하며 살아갈 뿐이다. 모든 선택들과 그 결과들이 모두 다 어떠한 가치들과 의미들을 모두 초월하는 ‘나의 운명’이었음을 받아들인다.
선택을 하며 살아 왔지만 나는 그것이 항상 ‘나의 운명’이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물론 운명은 미래가 있는 한 언제든지 바뀌고 변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 운명, 나의 삶(주체적인)을 스스로 잘 이해해주고 공감해주는 그래서 잘 수용하는 받아들이는 내 삶의 운명주의자가 될 것이다. 다가 온 모든 삶들의 상황들을 다 (내가 조심하여 선택한)운명이며 그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나의 책임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선택하며 살아갈 뿐이다. 마음이 참 편하다.


화목함이 빈자리(2005. 10. 05)

오늘 나는 나의 가장 특별한 병적 상황의 여건을 찾아보았다. 물론 앞으로나 그 이전에도 이러한 주제로 나를 이해해 봤고 또 보겠지만 오늘은 실감나는 시간을 가져봤다.
역시 장(場)의 문제였다. 특히 가족상황과 가정의 문제였다.
내 가정은 화목함이 빈자리였다. 채워진 자리가 아니라 항상 초라한 울분의 장소였다. 남들과 비교해서 생긴 울분이 아닌 것 같다. 그냥 ‘제대로’가 채워지지 않은 데서 온 불만과 분노심이라는 뒤틀림이었다. 이 ‘제대로’는 그저 그냥 평범한 것이었다. 평범한 환경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외진 곳으로 살아 온 것이다.
화목함 그저 평범한 화목함이라도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의 어린시절... 나는 40 평생 이 화목함이라는 것을 모르는 뒤틀린 삶 속에 허덕이며 살아 온 것이다.
화목함. 우리 가족 그 얼마나 화목함에서 멀리 있었나. 나는 제대로 있어야 할 이 화목함을 나도 몰래 밖에서 구하려고 애를 써 온 것이다. 너무나 화목함이 그리웠기에 그 빈 자리가 너무나 결핍되었었기에 나의 구함 즉 나의 욕구는 너무 지나쳤던 것이다. 그저 평범한 화목함으로 삶을 견디며 살면서 그런 삶을 받아들여야 했다. 나는 충분히 평범한 화목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의 이미 큰 펑크난 구멍에서는 평범한 화목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더 큰 화목 더 큰 따스함을 기대했기에 현실에서 벗어나 버린 것이었다.
정신병과 노이로제란 것은 평범한 화목을 받아들이지 않은 곳에서 생긴다고 본다.
그런 평범한 화목은 겨우 붕뜬, 마음을 가지런히 모으지 못한, 방심하여 구심점을 잃어버린 곳에서 생길 리가 없다. 평범한 화목은 그냥 조그마한 평범한 관계상황 즉 가족이나 나의 장(場)에서 서로 오가는 상호의존일 뿐이다. 이런 작은 상호의존을 받아들여야 한다. 가능한 한 작은 상호의존은 현실이고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만족이 오고 행복이 오는 것이다.
그저 견딜만한 고독과 불안 그리고 긴장과 고통을 받아들여야 한다. 거기서 멀리 넘어가면 병이고 노이로제인 것이다.
난 어린시절 너무 큰 극단적인 소외감에서 정서가 뒤틀린 것이다. 뒤틀린 정서란 화목함을 너무 크게 집착한 데서 기인된 비현실적 비생산적 대인관계였다. 나는 화목함의 공허를 메우기 위해서 그 자리를 갈구하는 데에 너무 큰 것을 요구했다. 다 실패한 것이다. 그 실패는 큰 놀램으로 화해서 나를 미쳐버리게 하는 것이었다. 항상 큰 부담 앞에 놀란 가슴은 현실살이를 외면하고 그래서 망상으로 도피한 것이다. 나의 최대한의 화목함의 갈구는 바로 여자로 귀결되었다. 그것도 나에게 맞지도 않는 여자들이었다. 그것들이 나의 망상들이고 비현실들이었다.
난 가끔 아랫도리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울고 있는 어린애인 내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 그것이 환상인지 옛날의 나의 실제 모습인지는 잘 모르지만 여하간 나는 너무 혼자였다. 아무도 나를 보호해주지 않았다. 화목한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남들과 같이 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병적으로 집착하게 되었다. 남과 함께하는 짝들로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알지를 못했던 것이다. 나는 공상에서 망상으로까지 그 비현실적으로 큰 화목함을 짝으로서의 여자들에게서 꿈꾼 것이다. 아니면 너무 짝들로 갈망하면서 일어나는 잘난체하는 나의 대인관계상황과 학문에의 병적 열정이었다. 그것은 다 짝들을 열망하는, 불가능한 화목함을 갈구하는 나의 무지였다.
이것이 나의 병적 의존심 즉 집착의 지점인 것이다. 이 집착은 금강경에서처럼 사실 아무것도 아닌 허망한 것에 대한 것이기에 본래면목 즉 ‘제대로’에서 이탈하여 병이되는 것이다.
지금 나에게 현실이란 내 가족과 나의 작은 건강한 장(場)을 잘 이루고 이끌고 나가며(강조) 화목함을 이루고 무엇보다 고독을 견디며 받아들이고 그 화목함을 내 가족과 나의 (변화하지만) 작은 환경들에 나를 내어줄 수 있는 여유를 지니는 것이 내 할 일인 것 같다.
항상 마음을 모아 내 마음의 주인이 내가 될 수 있도록 조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가능하면 나만을 벗 삼아 살아갈 수 있는(물론 불가능하지만) 시간을 많이 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래야 나를 살고 나의 현실을 챙길 수 있고 그래서 행복도 가능한 것이다.

나를 드러냄에 대하여(2005. 10. 13)

환자가 어느 정도 치료가 되면 자기를 드러내는 일에 열심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이렇게 자기를 드러내는(남을 향해) 일에 집착이 크면 클수록 의존심이 발동하고 있다고 보면 맞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자기를 드러내는 행위가 치료자 앞에서 일어나면 치료가 진행될 수가 있다. 그러나 뭇사람들에게 이런 자기집착 행위가 반복되면 병이 더 깊어질 수가 있다. 자기를 드러내는 자기 집착행위는 모두가 남에게 자기를 알아달라는 사랑받고픔을 갈구하는 것이다.
물론 자기를 인정받고 싶은 행위는 알게 모르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또는 습관적으로 일어난다.
이런 정신질환자들의 자기집착은 모두 좌절되거나 다시 자기를 퇴행시켜 병을 악화시키는 것이리라.
결국 ‘혼자’를 키우는 과정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결국 남이 자기에게 원하는 바가 있을 때 남을 도우려는 행위만이 건강한 행위인 것이다. ‘혼자’를 키우는 과정은 의존심을 자각하는 행위와 의존심을 합리화하는 무지에서 깨어나면서 ‘혼자’를 버텨 나가야 할 것이다. 남을 도우는 것도 결국 남이 어떻게 하면 자립해서 살아갈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춘 도움이어야 할 것이다.
우린 서로 그냥 필요한 것을 거래하는 상인일뿐이다. 여기서는 사랑의 감정보다도 그냥 그런 감정에 묶이지 않고서 행해지는 도움의 행위가 더 중요할 것이다.
남이 나의 사랑을 원할 때 우리는 그 사랑의 구애를 좌절시킬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좌절감은 포기와 체념으로 향할 수도 있다. 아니 좌절시키는 인위적 행위보다 그냥 그런 사랑의 구애에 무관심하는 것이 참 중요할 것 같다. 사랑하는 감정과 사랑받으려는 감정을 잘 분간해야 할 것이다. 사랑하는 감정은 사랑하는 대상에 얽매이지 않고 사랑한 대가를 잊어 버릴 수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사랑을 비롯한 모든 것에 집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혼자’를 키우는 과정은 의존심을 자각하고 의존심을 더욱 부채질하는 부당한 의존을 정당화시키면 안 될 것 같다.
‘혼자’는 자립이며 독립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심적해방인 셈이다. 남에게 의지하지 않는 남으로부터의 해방이기도 하다. 남에게 폐가 되는지에 대해서도 잘 분간하는 것도 중요하다. ‘혼자’는 힘들게 참고 견디며 ‘혼자’로서의 운명을 무엇이든 받아들이는 데서 잘 키워나갈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남을 도운다는 행위로 남에게 의지하는 그래서 남에게 폐를 끼치는 행동을 잘 분간하는 것도 참 중요하다. 의존을 잘 분간하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 의존심을 자각하고 분간하는 훈련을 많이 하는 것이 참 중요할 것이다.


심적 독립과 관계(2005. 10. 13)

잘 혼돈하기 쉽지만 심적 독립과 관계맺음은 서로 상보적인 상태이다. 많은 사람들이 독립이 관계를 끊는다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정반대이다. 독립한 사람은 어디에서나 관계를 잘 맺는다. 단지 부당한 관계 즉 의존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존관계는 심적 독립을 막는 것이다. 어디서나 관계를 잘 맺으려면 독립이 선행이 되어야 한다. 독립은 혼자로서 해방감을 만끽하는 상태이다. 그러나 혼자는 살 수 없기에 관계를 맺는다. 독립된 관계가 바로 상호공존의 관계이다. 서로 정도(正道)로 오가는 흐름이며 관계이다.
독립한 사람은 이런 정도(正道)에 민감하다. 그래서 자기와 남을 옳게 관계시킨다. 정도란 결국 남과 관계하면서 남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남을 해치지 않는 관계행위 속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정도는 자기만큼 남을 똑같이 존중해주는 것이다. 물론 자기혼자 아무리 이러한 정도를 간다하더라도 상대가 의존심이 너무 강하면 그의 공격적인 행위에 대항해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때는 무조건 의존심을 지닌 사람에게 무대응하는 것이 제일 좋다.
독립한 사람은 어떠한 곳에도 집착을 않는다. 집착의 대상이 무엇이든 그 모든 것이 허망하다는 것을 아는 자가 독립한 자이고 해방된 자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집착이 없이도 무엇이든 자기 할 수 있는 일에 의욕을 가지고 열심히 한다.


관계와 의존(2005. 11. 13)

의존심은 관계를 방해한다. 관계는 사람에게 장애를 없애주는 역할을 한다.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고통이 발생한다. 그래서 의존심은 관계를 방해하는 노이로제의 요인을 지닌다.
의존심 없는 관계를 맺는 것은 그 정체를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 우선 관계는 타인을 자기이익을 위한 대상으로 여기는 의존심을 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난다. 그렇다면 관계는 타인을 인정하고 나와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으로 잘 이루어진다.
결국 관계는 타인을 주체로 인정하면서 그 주체성을 배려해주는 마음으로부터 맺어지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배려를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관계를 생각할 수가 없다. 그 이외에는 모두 자기와의 대화에만 관심을 가져야 한다.
자기는 자기에게 의지해도 된다. 자기와의 대화는 즉 자기와의 관계는 타인과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상황에서 돌아가는 나의 귀의처이다. 나의 고향이다. 나는 이 나라는 고향에서 쉴 수가 있다. 자꾸 자기와의 대화에 익숙해지면 남을 이용하는 의존심이 줄어들 수가 있다. 이것이 참선이자 명상이다. 자기는 자기를 고향으로 여기고 모든 것의 문제해결을 자기로부터 찾는다. 그러면 자연히 남을 위한 배려 즉 관계를 맺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자기의 고통을 안은 채 일어나는 남과의 관계는 의존심이다. 잘 분간해야 한다. 자기의 고뇌나 고통 때문에 편안해지기 위해 남에게 부담을 주는 의존심을 잘 분간해야 한다. 그것을 잘 체크해서 그런 부정적 행위를 차단해야 윤회되는 부정적 현상을 끊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의존심을 잘 참고 그 대신 자기로 항상 돌아가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그래서 모든 깨달음과 지혜를 남을 위한 배려심으로의 열망을 키워야 한다.
그러면 의존심이 낳는 부정성을 알아보자. 의존심은 항상 이미 고뇌와 번뇌가 동반되어 있다. 우리가 의존할 남을 모르기 때문에 근심이 생기는 것이다. 남에게 의지해야 하기에 그 고뇌가 심해진다. 그리고 곧 좌절이 일어나고 분노와 두려움이 동시에 일어난다. 그리고 그런 두려움과 화 때문에 의존심이 더 커진다. 그리고 그런 모든 부정적 요소들은 서로서로 물고 늘어져서 서로에 대한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것들은 상황상황마다 맞게 자기의 얼굴을 내미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고뇌 번뇌인 것이다. 이런 부정적 요소들은 자기의 필요한 일을 못하게 자기 얼굴을 가린다.
항상 힘이 들면 우선 남을 향한 배려심으로 방향을 돌리는 습관을 갖자. 진정으로 저 사람을 도울 수 있는 방법(내가 할 수 있는 일)로 마음을 돌리자. 남이 자기 앞에 없으면 자기자신 내면검토를 고향으로 삼자.
남이 내 앞에 있으면 그가 자기를 위하는 대로 되도록 방해하지 말고 오히려 남의 세계를 도와주는 일을 해야 한다. 도움이 방해가 아닌지도 잘 분간해야 한다.
남이 자기에게 의지하려하면(이런 경우가 참 많은데) 자기는 그 대상이 되어 줄 수가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남을 진정으로 도울 수 있는 배려심을 잃어 버려서는 안된다. 남을 위한 진정한 배려심과 진정한 도움은 치열한 자기검토로부터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수행이다. 그러나 언제든지 남이 앞에 있으면 그런 수행도 포기하고 남을 향한 배려심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 자기 힘에 맞는 일로서 말이다.
그런 남 앞에서의 나의 상황이 참 힘들 때가 많다. 그 때는 항상 남을 방해하거나 해치지 않는 한에서 남에 대한 자기 할 일을 하거나 자기 일을 포기해야 한다. 자기혼자 있을 때 철저히 자기검토를 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자기검토는 공상이 아니라 자기에 대한 이해인 것이다. 때로는 자기이해가 치료자를 벗 삼아야 한다.


‘결여-배척의 눈’에서 최후심판자까지(2006. 04. 13)

투사는 여러 형상으로 우리 밖에서 어른거린다. 중요한 것은 이 여러 형상들이 확신을 동반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투사 형상 옆에서 실제 현실이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투사는 이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서 취하는 마음의 태도이다.
투사는 무엇보다 자기를 의지할 형상으로 투영된다. 그래서 의존심의 산물인 것이다. 투사는 또한 마음의 갈등을 동반한다. 현실이 엄연히 옆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존심을 지니는 사람들에게 현실은 억지로라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투사물 즉 투영물도 사실은 신뢰할 만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투사물이 이미 의존심으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그것을 의존하려는 태도를 취한 이상 이미 불신감을 주는 투사물 자체를 믿으려고 한다.
잘 믿겨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그 투사물에 대한 불신감을 억압한다. 현실과 투사물 사이의 갈등 속에서 우리는 이미 일차적으로 두려움에 휩싸이고 그 투사물의 불신감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또한 두려움이 누적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행히 투사물을 버리면서 현실을 받아들이면 힘들지만 점점 우리는 강해져서 현실적 태도를 취하면서 현실에 적응을 잘하게 된다. 반대로 인정해야 하는 투사물의 불신감을 억압하면서 그 억압의 대가를 받게 된다. 적개심이다. 적개심은 더욱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환각과 같은 정신병적 인지왜곡상황을 겪게 되고 의존심과 적개심은 더욱 가중된다. 정신병이 깊어진다.
나의 정신병이 나기 이전의 상황이 바로 그러했다.
다시 추적해보자. 유아시절 엄마의 배척감에 이은 의존심은 세상과 세상 사람들을 그 엄마로 우회 인지하게 되고 현실을 용감하게 못 받아들인다. 나는 이미 나의 투사물로 나를 보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투사물은 갖가지 내 마음의 불만적 형상물로 나타나면서 적개심이 심해지고 의존심도 자꾸 누적된다. 이런 엄마의 배척감은 ‘혼자’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나는 세상현실을 용감하게(힘들지만)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 ‘혼자’의 짝 즉 엄마의 다른 형상들을 갈망하는 투사물을 만들어 의지하려 하지만 세상 사람들과 세상 상황들은 나의 짝으로 존재할 수 없기에 항상 큰 낙망감으로 연결되고 만다. 습관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쌓인 나의 적개심은 갑자기 기독교식의 ‘최후심판자’의 형상으로 나타나고 나는 거기에서 현실보다 더한 고뇌와 고통에 불필요하게 시달리게 된다.
세상살이는 힘들다. 그러나 그런 세상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적응할 수도 있다. 힘들지만 망상의 투사물을 조심하기만 하면 세상살이의 고통이 배가되지는 않는다. 재미있게도 세상현실은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자꾸 자기의 ‘밥그릇’을 내놓게 마련이다. 정말 쉽게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적응이 되어간다. 생로병사 모두가 현실이다. 이것을 받아들이면 점점 우리는 용감해지고 현실생활의 적응도 잘하게 되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만족을 알게 되는 것이다. 나는 요즘 기본적이고 본능적인 현실 즉 먹고 마시고 자고 하는 이런 것들만이라도 누리려고 시도하고 있다. 나의 현실은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참 쉬운 것이다. 크게 힘들지도 않다. 욕심만 버리면...
나는 만족이 왔고 의욕도 생겼다. 다른 현실에도 이렇게(글을 쓰는) 일도 해내게 되는 것이다. 나의 개인적 현실을 항상 인정해야 한다.
의존심을 줄이는 일이 가장 큰 일이다. 그러기 위해선 두 가지 일을 병행해야 한다. 먼저 앞에서 말한 현실 즉 자기마음-감정을 잘 살펴 인정하는 것이다. 자기감정을 있는 그대로 잘잘못 따지지 말고 인정해야 한다. 자기감정을 속이거나 자기가 받아들이는 감정이 현실적인 감정과 다르지는 않은지를 잘 체크해야 한다. 그래서 진실하고 정직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다른 하나는 의존심을 자꾸 체크하고 검토하고 그것의 무용성을 잘 이해하는 것이 관건이다. 앞의 글에서 많이 언급한대로이다.
이 두 가지 일을 잘 하면 현실에 직면하면서 나름대로 현실의 고달픔을 잘 적응하면서 만족을 얻게 되는 것이다.
현실이란 것이 무엇인지를 의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잘 검토하고 받아들이면 현실은 참 받아들이기 쉬운 것으로 다가와 엄연히 자기와 함께 가는 것이다. 현실은 엄연한 것이다.
우리는 ‘혼자’라는 사실을 항상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이 ‘혼자’를 받아들이지 않고 ‘짝’을 (여자나 신이나 간에 어떤 형태로든) 받아들이면 자꾸 정신장애가 파생되어 불필요하게 남을 힘들게 하거나 자기를 힘들게 하는 나쁜 인격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고독하게 혼자 생로병사를 맞이하며 참고 극복하면서 살아가다 가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행복의 전부이다. 이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순간순간 함께하는 벗’은 존재할 수 있는 것이 현실적이지만 그이상의 비현실적인 ‘억지로 믿어야 하는 여자나 신 같은 것들’은 다 포기해야 한다. 벗도 ‘언제나 집행유예된 포기’를 밑바탕으로 해야 오히려 진정한 벗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살면서 우리는 남과 자기에게 고통을 범할 수도 있으나 이것은 현실적인 것이어서 인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장애가 있어서 적개심으로 가득 차거나 의존심으로 해서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은 불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극복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필요한 고통만으로도 살기가 힘들다. 하물며 불필요한 고통을 가중시킬 필요가 있는가. 가중시킨다는 말은 바로 현실의 고통을 그대로 안고 있으면서 불필요한 고통을 그 위에 올려놓는다는 것이다. 투사물을 억지로 믿고 기대어 살면서 현실의 고통을 얼마나 피할 수 있는가. 물론 현실생활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자기 현실을 받아들이는 삶보다는 그런 신앙과 같은 삶은 현실살이 보다 더한 고통을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무의식적 적개심 속의 억압된 두려움이 자리 잡게 된다고 본다. 이 적개심이 불필요하며 우리가 극복할 수 있는 병인 것이다.
현실에 귀 기울이고 수용하고 인정하고 극복하고 적응하고 만족을 가질 수 있도록 사는 것이 나의 인생철학이다.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가버렸지만 이런 이야기가 지금 나에겐 더 중요하다.

배척감에 대해(2006. 04. 25)

중요한 것은 배척하는 타인은 항상 배척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 배척하는 타인은 자꾸 변화하기 때문이다. 어떤 존재이든 지속적으로는 배척할 수가 없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배척을 받아(아니면 배척과 관계없이) 지니게 된 배척받은 마음의 파생물들이다. 배척받은 마음은(나에겐 ‘혼자’가 된) 먼저 슬픔이 깃든다. 그러나 배척한 대상이 자기를 보호 해주는 절실한 존재일수록 두려움과 겁에 휩싸인다.
그래서 배척된 마음의 파생물은 슬픔에서 혼비백산할 수 있을 겁에 휩싸이는 데까지 나아갈 수가 있다. 물론 슬픔과 겁과 같은 두려움은 인생살이에 불필요한 병이다. 그리고 이 배척받은 마음의 절실함이 클수록 그 마음과 행동에 일거수 일투족에서 무용한 고통의 원인제공자가 되는 습관의 인자가 되는 것 같다. 남을 괴롭히거나 자기를 괴롭히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절실한 존재로부터 배척받은 마음은 어떤 파생물을 낳을까. 이것은 잘 따져 보면 우리에게 불필요한 파괴시키는 행위를 살펴보면 그런 모든 행위의 원인이 그 배후감정 즉 배척받은 마음의 줄기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배후감정의 영향력의 강도에 따라서 거기에 지배된 행위는 우리를 고통을 나락으로 빠뜨리는 것이다. 자기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무용한 행위에 빠져 있는지 그래서 그런 불필요한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행위가 어떤 고리로 자기의 배후감정에 휩싸여 나타나는지를 잘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배척받은 마음은 먼저 슬픔에 잠겨 일을 그르치지만 두려움이나 타인에 대한 적개심의 형태로도 나타나서 더 크게 일을 그르친다. 무엇보다 그런 부정적인 마음들을 억압해야 할 때가 있어서 나타나는 것은 마음속에 괴로움이 말할 수가 없다.
어느 누구에게 절실한 존재라면 가능하면 그 존재를 배척해서는 안 된다. 배척하는 마음 자체가 병적인 것이고 인격의 미숙이다.
나는 소아유년시절 때 받은 배척감이 나의 인생 전체에 어떻게 작용되어 강화되거나 약화되거나 하는 데서 출발해서 그 배척감의 불필요한 파생물들을 잘 이해하는 것이 관건이 되어 있다.

상황의 정당성과 자기개입의 인정과 책임(2006. 04. 28)

나와 함께한 모든 상황은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다. 우리는 그런 여러 상황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를 못하는 경우가 많다. 뭔가의 이유가 있어서 우리는 상황 자체에 개입해서 자기화하려고 한다. 물론 더욱 더 좋은 정당성이 있다면 우리가 개입해서 그 상황에 일원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정당성은 더 낫고 더 나쁜 것이 없는 것 같다. 물론 자기상황 즉 자기가족이나 자기집단의 핍박이나 박해가 있다면 그런 상황에 우리는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그러나 최소한의 자기상황이 보장이 된다는 판단이 서면 가능하면 그 상황의 자기개입을 욕심낼 필요가 없다. 욕심은 이미 화가 되는 것이고 남도 해치고 자기도 해친다. 결과적으로도 그 욕심은 결과의 보장이 없다.
상황에 최소한으로 자기개입을 하는 방법은 요구하는 감정 즉 의존심을 줄인 그런 감정을 섞지 않고 말이나 행위로만 개입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최소한 마음의 고통은 줄일 수 있고 불필요한 에너지가 낭비되지 않는 것이다.
혼란하다고 판단되는 상황. 자기에게 불리할 지도 모른다는 상황. 이런 모든 상황들에 과연 내가 불필요할 지도 모르고 필요하다고 해도 요구하는 감정이 섞인 상태로 말이나 행위의 개입이 정녕 무용하다는 판단이 중요하다.
의존심이 내재된 개입. 그런 감정이 묻히지 않은 말이나 행위로 우리는 적극적으로 상황에 개입할 수도 있고 (마음이 무심하기에 편한 채) 더 많은 일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에너지가 넘치는 것은 의존하는 마음이 줄어진 채 마음이 편한 상태에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무엇보다 상황의 정당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고 상황의 그런 정당성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화하려는 것이 결과의 보장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자각이 필요하다. 그러면 보장되는 것은 그 상황 속에서의 자기마음의 평화와 상대의 폐가 되지는 않는다. 정당한 방관자가 되는 것이 그 상황을 존중하는 것이다. 그 상황의 어느 누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경우에는 꼭 관철시키려는 욕심내는 그런 마음을 버리자. 아무 경제적인 결과의 보장이 없다는 것도 꼭 알자.
단지 방관자는 마음과 감정의 배제가 중요하지 말과 행위에 있어서 개입은 뭐든지 가능할 수가 있다.
단지 말과 행위만 필요하다. 요구하는 마음감정은 불필요하다. 현재의 평화가 보장되는 문제이기에 이만큼 경제적인 것은 없다.

근본에서 병이 될 소지가 있는 것에서 처리가 안 된 것들(2006. 05. 06)

우리 사람의 근본은 무엇인가. 아마 이 근본은 태아기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우린 태아기나 소아시절 무엇보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 나를 품거나 안고 있는 엄마만 건강하다면...
그러나 우린 불행하게도 엄마에 의해서 첫 문제를 떠안을 수가 있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그 곳은 바로 아무 이름도 붙일 수 없는 생명 이전의 상태일 것이다. 아무런 것도 있을 수 없다. 아무런 문제도 없다.
그러나 우린 생명으로 태어난다. 여기서 엄마와 함께 문제를 안을 수가 있다.
나는 요즘도 물을 하루에 10리터는 마셔야 한다. 이것이 문제의 시발점이었음에 분명하다. 나는 엄마의 젖을 잘 받아먹지를 못했다. 엄마가 아버지의 무능력한 데에서 기인한 생존전선에서 나를 보호하고 젖을 잘 주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젖을 큰 누나에게서 얻어먹거나 젖이 아닌 끓여서 식힌 쌀뜨물 같은 것을 먹어야 했다. 나에게 쌀뜨물은 지금의 물이었다. 나는 요즘도 그냥 물 보다는 그런 쌀뜨물이 더 친숙하다.
그러나 그것은 젖이 아니었다. 나에겐 누나의 젖이나 쌀뜨물 보다 엄마의 젖이 더 필요했다. 난 생명에서부터 결여 속에 있게 되었다. 물론 엄마의 젖 자체가 나에게 결여 자체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누나의 젖이나 잘 맞는 나의 쌀뜨물이었으면 나는 충분하고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누나는 나를 엄마만큼 행복하게 안아주지 않았을 것이고 쌀뜨물은 정말 내게 고역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나의 생명은 살기 위해 그것들을 받아들여야 했다. 고통이 생겼다. 그것을 잘 받아들일 수가 없었고 생명은 죽지 않고 고통에서 사랑과 미움이 끼어들었다.
동생이 태어나자 나는 더욱 위협감을 느끼고 따돌리는 혼자를 경험한다. ‘배척된 혼자의 경험’.
근본에서 사랑과 미움을 알 필요가 없다. 그리고 거기에서 파생된 ‘혼자’를 알 필요가 없다. 나는 근본에서부터 사랑과 미움 그리고 혼자를 병적으로 지니게 된 것이다. 내가 병적이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근본이 있어서 그럴 것이고, 병적이라면 사랑과 미움에서 파생된 혼자를 안고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배척감’을 안고 두려움에 쌓여 있다. 나는 사랑받을 곳을 향해, 결여된 엄마를 만회하기 위해 여자를 찾고 신을 찾고 부처를 찾고 있다. 근본이 잘 보육되어졌다면 이런 허공의 짝들이 왜 필요할 것인가. 근본이 잘 살려진 채 세상에 태어나는 생명들도 많이 있다. 그들은 건강하게 현실을 살 수 있다. 불행히도 나는 그러하질 못했다.
나는 물을 많이 마셨다. 그런 이유로 오줌을 잘 싸고 가족들은 나를 놀리거나 배척했다. 그들도 모두 무지 때문에 그러했을 것이다. 지금 9살이 된 나의 딸을 바라보면 나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행동할 소지가 많았고 많을 것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근본에서 벗어난 노이로제. 즉 배척감 속의 나. 현실에서 없는 그런 배척감. 그리고 두려움. 불필요한 두려움. 그리고 과대망상의 두려움. 이런 것들이 나의 병적인 모습들이다. 이것을 나는 받아들여야 한다. 여기서 나의 모든 뒤틀린 현실생활이 시작되었고 지금도 그 여파와 파생물들 속에 살아가야만 한다.
나는 받아들인다. 이런 삶을. 내가 선택하는 무엇이든. 복수를 하고 싶으나 참아야 한다. 이해해야 한다. 복수할 대상이 없다. 복수할 대상들도 다 나와 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짝이나 신이나 부처는 근본에서 없었고 나는 이들에게 복수할 필요가 없다. 근본에서 없었던 것을 인정해야 한다. 모두 다 이런 근본에서 뒤틀린 왜곡된 현실에서 파생되는 나의 요청들인 것이다.
나의 현실은 이런 배척감을 자각하고 자꾸 훈습하는 데서 나타날 수가 있다. 이제 태어난 이상 근본을 찾을 수는 없다. 그러나 현실감 즉 배척감을 벗어난 나를 찾을 수가 있다.
어렸을 때의 그 배척감이 청년기에 정신분열이 되어 어떻게 노년기를 살고 죽어갈 수가 있는가에 나의 인격이 결정된다. 아무튼 살아보자. 근본에서 우리는 모두 하나이고 우리 모두는 아무런 문제도 요청도 욕구도 필요하지 않았다. 이 근본을 받아들인다. 생명은 이 근본을 잘 지켜 나가는 일이다. 아무런 사랑과 미움의 요청이나 의존심 그리고 욕구나 문제도 태어나지 않는 그 상태가 근본일 것이다.
배척감 속의 나.

절박함에서 해방되기(2006. 06. 15)

인생에서 절박함은 불필요한 것 같다. 그저 할 수 있는 것 하고 인정하고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절박함으로 사는 것은 그렇게 절박하게 또 무용하게 매달려 있다는 것이다. 놓으면 그만인데... 사실 매달려 있으나 놓으나 별반 차이가 없다. 마음먹기에 따라서 다 별반 차이가 없게 되어 있다. 그러나 절박하게 매달려 있으면 최소한 현재의 마음고생으로 불필요한 고통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놓아 버려야 할 일이다.
절박함을 지니고 산다는 것은 자기의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생산하게 된다. 절박하면 ‘어린혼자’를 느낀다. 그것이 나의 핵심감정이다. 핵심감정의 원인은 절박한 집착이라고 보면 맞다. 절박한 집착에서 해방되면 핵심감정에서도 해방될 수가 있을 것이다.
알만한 것은 알게 되고 억지로 알려고 할 필요가 없다. 그저 절박하지만 않으면 그만이다. 사랑에도 세상살이에도 그리고 죽음과 병에도 절박할 필요가 없다. 운명과의 대화는 그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집착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절박하지 않은 것이 집착되지 않은 것이다. 그 무엇보다 왜 절박할 이유가 없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절박할수록 일은 더욱 잘 풀리지 않는다. 집착이 클수록 상황은 악화되기 때문이다.
절박함에서 해방되는 것은 미래의 근심과 가정의 습관 그리고 (운명으로)인정하지 않는 것을 버림으로서 출발할 수가 있다. 그리고 방심하면서 사는 것과 절박함에서 해방되어 사는 것은 아주 다르다. 절박하지 않다는 것은 받아들이면서 만족하면서 자기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는 것이다.
내가 무엇에 절박해 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렇게 절박함이 필요한가를 잘 따져보고 그 절박함을 놓을 수 있어야 한다.
적당하면 절박하지 않은 것이다.

자기분노의 인정-자기인정의 기반-자기질책-자기억압의 해방-자기인정
(2006. 06. 23)

우린 타인과 함께 살아간다. 그러나 우린 자기문제를 지니고 살 수 밖에 없다. 문제는 자기문제라는 것이다. 이 말은 남들이 나를 어떤 식으로 대하든 그 대상들의 나를 향한 예우는 나 자신의 존재상태(이것이 어떻게 생겨났던 간에)에 걸맞는 인과관계를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남들이 나를 인정하지 않으면 분노가 생긴다. 사실 남들이 나를 분노하게 만든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남들은 나를 대하여 행위를 하지만 그런 행위에 대한 분노는 내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남들의 존재태를 완전히 알았다는 것은 사실 모두 다 환각이다. 물론 임시로 남들이나 나 자신을 잠정적으로 이해할 수는 있지만 절대적으로 완전히는 이해할 수가 없다. 만사가 마찬가지이다. 모든 이해는 완벽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해는 순간순간 존재한다. 순간순간 그때마다의 타인들에 대한 이해와 공감은 가능한 것이고 그 과거와 그 상황해석들과 함께 열린 것들이다.
물론 우린 모두 이미 항상 남들로부터 존재태가 생기되기 때문에(그 내용은 사실 알 수가 없다) 사실 우리 자신의 잘잘못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하기에 우린 모두 무죄인 것이다. 또한 잘난 것도 없다. 모두가 평등 중립일 뿐이다.
그러나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남들 행위들 그 후에서 행위를 낳고 그 행위에 대한 반성이나 인식을 하며 이해한다.
이런 우리 자신의 인식과정 속에서(남들로부터 온) 분노가 생길 수가 있다. 분노-화는 사실 자기분노이고 이 자기분노의 원인은 자기 속에 있다. 예를 들어 분노의 전이가 일어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과거의 분노가 현재의 분노가 될 수가 있다.
정리해보자. 우린 모두 타자로부터 내용 없는 관계로부터 분노한다. 그 분노는 우리 자신의 내면의 문제이다. 물론 우리 자신이 잘잘못한 책임의 문제는 아니지만 여하간에 우리 자신 속에 거주하게 되어버린 분노심인 것이다. 그런 밖에서 생기된 자기문제인 분노를 남이 근본적으로는 치유해줄 수가 없다. 남으로부터 그런 분노가 소멸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주체적인 해결법이 아니다.
분노는 자기분노라고 보아야 한다.
분노심은 사실 자기인정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남으로부터이든 자신으로부터이든 간에) 생기는 자기분노이며 이 분노심은 ‘자기의 자기에 대한 질책’으로 인해 가중억압 된다.
지금 하고 싶은 이야기는 분노심이 생기는 때 이것을 처리를 하는 방법이다.
분노심은 자기인정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생기며 우선 자기인정이 속히 회복되어야 한다. 그 어떤 분노심이라도 자기인정이 일어나면 사라진다. 남으로부터이든 자신으로부터이든 간에... 분노심에서 자기인정이 일어나기 위한 기반이 바로 그 분노심을 자신 속에서 인정해야 한다. 자기자신에게 그 분노심을 인정하고 표현해야 한다.
분노심을 억압시키는 개입되는 여러 밖의 여건들이 있다. 그런 여건들 때문에 우린 분노심을 충분히 인정하지 못하고 표현(자기자신에게)하지도 못한다. 양심이라는 것으로 포장된 남들로부터 책이나 말들로부터 주입된 기준에 의한 것이다. 우선 이런 자기분노를 억압하는 자기질책의 기준선(잘잘못의 기준선)을 모두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 우린 우리 자신의 분노심을 충분히 인정하면서 자기인정을 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분노의 해방은 자기분노의 인정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말이 길어지니 흐릿해진다. 중요한 것은 분노는 자기분노이며 자기가 해결해야 하며 특히 자기를 질책함으로써 분노를 가중억압시키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잘잘못 판단여건의 기준선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자기분노를 깊게 인정한다는 것은 깊이 오래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그 분노를 가슴에 참으면서 안고(자각하며) 있어야 한다. 참으며 안고(자각하며) 있다는 것이 분노를 인정하는 방법인 것이다. 그리고 무의식중에 습관적으로 일어나는 ‘자기의 자기에 대한 질책’을 잘 체크해야 한다.
분노심을 자각하며 참으며 일어나는 자기인정이 중요한 것이다.

정리2(2006. 07. 07)

나는 먼저 ‘혼자’라는 현실을 받아들이질 못했다. 그 이유는 아마 부모님이 어린 나를 잘 돌봐 주지 않아서 그러했을 것이다. 나는 ‘혼자’에 허덕이며 비밀스런 생존을 꾸려나갔다. 물을 많이 먹어서 잠자다가도 새벽에도 일어나 물을 먹으려 애를 쓰던 기억이 난다. 가족들이 내가 물을 먹지 못하도록 위협을 가했기 때문이다. 살금살금 물을 억지로 먹으려면 정말 힘이 들었다. 그리고 이내 다시 물을 먹기 위해 머리 속에 계획을 짜야 했다.
나는 ‘혼자’ 즉 ‘비밀스런 공백상태인 혼자’가 되어있었다. 소아기 때 이렇게 살아나가는 것이 너무 힘이 들었다. 유년기에 들어오면서 옆집 여자아이를 참 많이 좋아했다. 나는 자신이 없었다. 왜냐하면 이미 나에게는 마음속의 ‘공백’을 지니고 있어서 자신감이 떨어졌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 대한 환상을 꿈꾸었다. 머리 속의 환상과 공상. 아마 엄마가 이런 환상의 자리에 엄연히 존재했었어야 했다. 현실 속에서 엄마가 그녀 자리를 대신하고 나를 ‘혼자’로 내버려두지 않았어야 했다.
나의 공상은 유년기 초등학교 시절에도 계속 되었다. 이영주라는 애를 참 많이 좋아했고 부러워했다. 그녀는 모자라는 것이 없었다. 나는 그녀에 비해 너무 초라했다. 그리고 초라한 만큼 억울함이 내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런 억울함은 내가 ‘혼자’라는 현실을 받아들이지를 못했기 때문에 생긴 감정이다.
이제 나는 ‘혼자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남과 같이 살기 위해 그리고 남에게 인정을 받아 그 공백을 메꾸려 애썼다. ‘빠진 혼자’였다. 그래서 항상 두려웠고 불안했다. 남들에게 사랑받으려 애썼다. 그러나 좌절할 때가 참 많았다. 부산에서 나는 나의 사촌 조카를 좋아했다. 그러나 나는 너무 초라한 조그마한 식당배달원이었다. 마음속에 간직하며 살아 온 그 세월. 그리고 큰 도발과 그 대가. 억울함. 나는 왜 이렇게 ‘혼자’일까... 억울했다. 도무지 그 ‘혼자’가 풀릴 길이 없었다. 생활 보다는 공상이 더 좋았다.
이 공상의 습관은 유년기를 넘어 청년기 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그 공상의 습관이 현실화시키려고 애를 쓰면서 그런 현실화 과정 속에 갈등과 좌절을 많이 겪는다. 주로 여자애들이 그 대상이었고 여기서 나의 학문과 철학사상이 모두 어떻게 하면 잘 내세워 져서 그들에게 인정받고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하는 데서 출발한 비현실적인 특별한 것들이었다. 나는 특별해야만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 특별함은 ‘혼자’인 나를 더욱 ‘특별한 혼자’로 내몰고 갔다. 남들과 유리되어 있었다. 그럴수록 나는 더욱 인정을 받아보려고 애를 썼다. 남에게 인정을 받는 것만이 나의 ‘혼자’를 채울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런 행위는 다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남들은 내가 요구하는 만큼 나를 인정하고 사랑해줄 수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대학원 박사과정 그 어느 날. 나는 어느 ‘특별한 너무나 기괴한 혼자’를 경험한다. 나는 이 세상의 사람이 되지 못하는 논문과 사고를 하기 시작했다. 나의 ‘혼자’가 극에 달한 것이고 당연히 극한의 공포가 엄습해왔다. 나는 정신병자가 되었다.
의존적 공상의 습관이 신이나 부처를 요청하여 그 어느 징후와 맞물려서 그런 것들의 존재함으로 착각하였고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었다. 나는 그런 신들과 부처를 요청하고 착각하여 느끼고 그들의 응답을 스스로 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다. 어느 정도는 그런 초현실적인 존재들에 대한 의존심이 내포되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나의 이제껏 쌓여 온 적개심이었다. 많은 좌절 속에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 적개심은 당연히 그런 신들과 대립이 되었다. 내가 나를 차단하고 있었다. 차단하는 만큼 적개심은 활개를 치고 나는 그 적개심으로 인한 깊은 죄책감으로 ‘저주받은 혼자’가 되어 버렸다. 상상도 못할 공포에 사로잡혀 살아갔다. 현실생활은 또 어떠한가. 도무지 현실에 적응이 되지 못했다. 아내가 참 많이 도와주었다.
나는 정신치료를 하면서 나의 적개심을 인정하는 힘을 길러 나갔다. 적개심을 인정하니 환청이나 환각이 사라졌다. 나는 요즘 ‘공백인 채 혼자’인 나를 자기존재함으로 변환하기 시작했다. 나는 ‘혼자’를 ‘자기’로 인지하기 시작했다. 나는 ‘혼자’가 오히려 ‘해방’임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혼자’가 그 의존성을 놓아 버린다면 그리고 그 ‘공백의 혼자’가 의존심의 출발점이었고 좌절감의 계기였고 적개심과 환각의 계기가 되었으나 이제 참으로 의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 오히려 해방됨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지금은 이 ‘해방된 혼자’를 잘 키워나가야 된다고 생각한다. 나의 ‘혼자’는 ‘해방’을 의미한다.
나의 이런 전 인생과 앞으로 내가 걸어가는 삶 모두가 항상 그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나자신의 정체성을 허물지 못한다는 것을 내가 인정하리라. 그 어떤 존재들에 의해서도 나를 판단하거나 심사할 근거가 없다. 나는 내가 나 자신을 인정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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