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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망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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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822회 작성일 03-11-14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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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잊어버려서 걱정이 되신다구요 ?

어느 추리 소설의 주인공은 10세 경에 아버지를 살해한 괴한의 얼굴을 잊지 않고 있다가, 30여년 후에 우연히 범인과 맞닥뜨리면서 사건에 휘말린다. 10여 년 전에 인기를 끌었던 유행가에 '잊으려고 할수록 그리움이 더욱 더 하겠지만'이라는, 사랑 노래에 전형적인 가사도 있다. 반면에 아무리 공부를 해도 막상 시험지를 받으면 기억이 가물가물해져서 애를 태우는 학생도 많다. 이처럼 순간적인 인상이 생생하게 남기도 하고 괴로워도 지울 수 없는 추억도 있지만, 일상에서는 소위 건망증 때문에 곤란을 겪는 일이 더욱 흔하다. 이렇게 잊지 못해서 또는 잊어버려서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기억이란 도대체 어떻게 생긴 놈일까?

강한 감정이 동반되면 쉽게 기억해

대다수의 사람들은 기억이란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힘들이지 않아도 저절로 또는 잊지 않기 위해 되뇌다 보니 기억된 것이려니 생각한다. 그러면 왜 어떤 것은 기억되고 어떤 것은 잊혀질까? 우리가 기억 속에서 어떤 것을 다시 꺼내 쓸 수 있기 위해서는, 우선 그것을 보거나 듣는 등 지각하고 경험한 다음에 머리 속에 저장해야 한다. 이와 같이 기억은 기록하고 저장했다가 재생하는 세 단계를 거친다고 할 수 있지만, 말처럼 간단하지는 않다.

앞서 보았듯이, 사랑하는 아버지나 연인에 관한 것처럼 강한 감정이 동반되는 경우에는 매우 쉽게 기억된다. 또 시험 직전에 급하게 외운 것처럼, 주의집중력이 극도로 높아진 상태에서 마주한 것도 빠르게 기억된다. 하지만 몹시 피곤하거나 관심이 없는 경우 또는 습관적인 일이나 다른 일에 몰두한 채 하는 일들은 잘 기억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필자는 안경을 어디 두었는지 곧잘 잊어버리고는 하는데, 대개는 졸리거나 다른 일에 빠져 있을 때 습관적으로 깨지지 않을 만한 곳에 안경을 모셔놓고는 허둥대는 것이다.

익숙한 것도 잘 기억해

그렇다면, 이런 의문을 갖는 분도 계실 것이다. 차를 타고 가다가 창 밖으로 지나친 풍경이 잊히지 않고 떠오르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까? 기억의 두 번째 단계인 저장 역시 무차별적으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우리가 경험한 것들은 머리 속에 이미 저장되어 있던 것들과 비교, 분류되며 논리적인 추정을 거친다. 차창 밖으로 무심히 보았던 풍경이 고향의 산과 들 또는 언제가 감동적으로 본 적이 있는 사진을 떠올리게 한다면 그냥 사라져버리지 않는다. 한편으로,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어떤 강렬한 기분이나 생각과 이어질 때도 역시 그대로 흘러가 버리지 않는다. 발가벗은 나뭇가지 사이로 희미하게 저녁 햇살에 비치는 강물은, 몹시도 쓸쓸하게 느끼는 사람의 뇌리에 아로새겨질 수 있다. 또한 우리가 익숙한 것도 잘 기억된다. 미리 예습을 해서 사전 지식이 있는 학생은 강의 내용을 많이 받아들일 수 있지만,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모르는 학생은 극히 일부만 기억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하나마나 한 얘기가 되겠지만 노력이 따르던 그렇지 않던 간에 반복되는 것은 오래 기억된다.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현상

정신과 의사라는 노릇을 하다보니 기억력이 나빠졌다고 걱정하는 분들을 많이 대하게 된다. 예전에는 한번만 들어도 기억되던 것들을 두 번, 세 번씩 들어도 잊어버린다거나 공과금을 제 때에 내지 못해 과태료를 물었다며 혹시 치매가 아닌지 자못 심각한 태도들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런 분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낭패를 보았는지 시시콜콜하게 얘기한다는 점이다. 어찌도 그렇게 세세히 기억하는지 듣다보면 내심 감탄이 될 정도이다. 그래서 이리저리 얘기하다 보면 걱정거리가 있어서, 화가 나 있어서, 다른 일로 바빠서, 몸이 좋지 않아서 등등 그럴 수밖에 없었을 이유들이 곧잘 튀어나온다. 뿐만 아니라 사소한 손실은 볼지라도 결정적인 실수를 했던 분은 매우 드물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뇌 세포는 하나씩 죽어 가는데 떠맡게되는 역할은 많아져서 관심도 흐트러지니, 기억이 이전만 못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래도 걱정이 남는 분들이 계실 것이다. '뇌 세포가 다 죽어버리면 어떡하나?' 필자가 직접 세어본 것은 아니지만, 사람의 뇌에는 평생 한번 써보지도 못하고 땅에 묻을 정도로 많은 수의 뇌 세포가 있다고 한다. 이 글을 관심 있게 보시는 분들은 기억력이 떨어지는 듯 하여 치매가 걱정스러운 중년층 이상이 대부분일 것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치매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나 쓰이는 말이었데, 어느새 코흘리개도 중얼거리게 되었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치매에 대해 워낙 많이 대하다보니 (실상은 지극히 단편적인 정보에 불과한데도) 반복 학습이 되고 '아는게 병'이라고 괜한 걱정을 사서하는 분들이 하나 둘씩 늘어간다. 다시 강조하지만, 대다수는 정상적이다. 그리고 치매 이외에도 병적이라고 할만큼 기억력이 저하되는 이유는 무척이나 다양하다. 그렇지만, 그게 뭔지 가르쳐드릴 마음은 조금도 없다. 잘못하면 사회불안을 조성한 죄로 잡혀갈지 모르니까.

어찌 보면 적당히 잊어버리는 것이 우리의 삶을 더욱 건강하게 해준다. 오죽하면 '망각이 최상의 치료'라는 말이 있겠는가? 하지만, 기억이 염려스럽다면 머리 속에 저장할 때까지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살펴서 해결책을 찾아보자. 그래도 나아지지 않거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고? 그럼 차라리 병원에서 전문적인 조언을 구하고 적절한 대책을 세우자.

강남성심병원 정신과 이중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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