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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춤과 6자 회담 (박승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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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154회 작성일 04-02-06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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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기사> 조선일보 2004. 2. 6. 기사에서 전재하였습니다.

제목: 고구려 춤과 6자회담

‘금빛 꽃 장식을 모자에 꽂았는데/ 백마(白馬)는 머뭇거리네/ 나는 듯한 춤사위에 소맷자락 넓은 것이/ 마치 해동(海東)에서 온 한 마리 새 같네.’

중국인들이 시선(詩仙)이라고 부르는 이백(李白)이 쓴 시다. 한 행이 한자(漢字) 다섯 글자로 된 오언절구(五言絶句)다. 이 시의 제목이 바로 ‘고구려(高句麗)’다. 고구려인이 날아갈 듯이 춤추는 모습을 보고 생생하게 표현한 시로 중국학계는 추정하고 있다.

이백은 생년월일이 분명치 않으나, 대체로 서기 701년부터 762년 사이에 살았던 사람으로 중국학계에서는 추정하고 있다. 고구려는 기원전 37년부터 서기 668년까지 존속했다. 고구려가 멸망한 30여년 뒤에 출생해서 살았던 이백이 어떻게 해서 고구려인이 춤추는 모습을 보고 시를 썼을까.

이에 대한 중국학계의 추정은 이렇다. 당(唐) 태종(太宗)이 첫 고구려 정벌 원정에 나선 것이 서기 645년경.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따르면, 이때 당 태종은 약 7만명의 고구려인들을 중국 중원(中原)으로 ‘이주(移住)’시켰다. 이후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약 20여년 동안 많은 고구려인들이 중국 내륙으로 끌려갔으며(우리 입장에서 보면), 멸망한 이후에는 더 많은 고구려인들이 중국의 황하(黃河) 이남지방으로 끌려가 고달픈 삶을 이어가야 했다.

그러니까 이백이 살았던 서기 700년대 초반의 당나라 곳곳에서는 고구려인들이 전통춤을 추며 삶을 이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거라는 말이다. 이백쯤 되는 시인의 눈에는 이미 초라하고 꾀죄죄해진 고구려인이 춤추는 모습에서, 과거 백두산 근처를 호기있게 날아다니던 솔개의 모습이 보였던 것일까.

중국문학사에는 이백이 쓴 ‘고구려’보다 200년 앞서 북주(北周)의 왕포(王褒)라는 시인이 쓴 ‘고구려’라는 시도 있다. 이 시 역시 고구려인들이 넓은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날아갈듯이 춤추는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했다.

중국이 고구려사를 먹어버리려 한다고 해서 요즘 우리 국민들은 가슴이 답답하다. 그러나 중국 역사상 최고의 시인이 고구려라는 이민족(異民族)이 춤추는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한 시까지 엄연히 남아 있는 것이 현실이다.

또 고구려가 바로 조선민족의 조상이라는 것은 중국의 보통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다. 중국인들은 조선족이나 한국인들을 욕할 때 ‘가오리 방쯔(高麗棒子)’라고 한다. 성적(性的) 비하의 의미를 담은 ‘고려 몽둥이 같은 놈들’이라는 뜻이다. ‘가오리(고려)’나 ‘가오쥐리(고구려)’가 같은 뜻의 말임도 중국인들은 다 안다.

굳이 ‘위서(魏書)’를 들춰보지 않더라도 다 안다. 고구려를 ‘동북지방의 소수민족 정권’이라고 기술하려 하지만 ‘소수민족’이라는 말 자체가 1949년 중국공산당 정권이 수립된 이후에야 겨우 생겨난 말이라는 것도 중국 보통 백성들은 다 안다.

문제는 우리다. 중국에 고구려가 우리 민족의 역사라고 기술한 책은 얼마든지 있다. 그런 기록이 바다라면 ‘고구려가 동북의 소수민족 정권’이라고 쓴 책은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냇물에 불과하다.

우리가 답답해해야 할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다. 오는 25일부터 열린다는 베이징 6자회담에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며, 말도 제대로 못하고, 중국과 미국, 그리고 북한의 눈치나 살피는 그런 짓을 안 해야 한다. 그래야 이백의 시 ‘고구려’에 나타난 것처럼 중국 중원으로 끌려가 민속춤을 추는 그런 처지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박승준 전문기자 )
sjpark@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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